인생
지하철에서
어트레이유
2011. 3. 4. 04:34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3호선 교대역에서 전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수레에 쌓인 커다란 과일 상자들이 보였다.
몇 정거장 지나자 전동차 저 쪽 끝에서 누군가 딸기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등이 아치형으로 굽은 그 할머니는 딸기상자를 들고 이 쪽 무더기로 오는 동안
몇 사람에게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권하셨다. 이내 더듬거리는 발걸음으로 무더기 앞에
도착한 할머니는 손에 들고 있던 딸기상자를 수레 위 과일상자 위에 합쳐놓는다.
수서역에 이르렀다. 할머니는 "내려야 하는데" 를 연신 되뇌이며 앞에 있는 청년들을 바란다. 수레는 두 개. 할머니는 혼자. 청년들은 아니 일어설 수 없다. 목적지가 그 곳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우물쭈물하며 이내 과일상자가 올려져 있는 수레와 함께 내렸다. 나는 엉덩이가 반쯤 들렸다가 그냥 자리에 굳어버렸다. 문이 닫히고 열차는 출발하고 그네들은 창 밖으로, 뒤로 뒤로 멀어진다. 내가 저 바깥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나의 반질반질한 공명심에 되뇌인다. 쭈뼛거리지 않고 두 발을 떼어 저 문 밖으로 나갔다면? 마음의 결과는 알 수가 없다. 단지 저 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나의 마음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이 앞서 지나가버리고나면 마음만이 그 뒤에 남는다.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상의 시간, 즉 과거 속에 언제까지나 자신의 마음을 묶어놓고 괴로워한다. 괴로워하는 것만이 그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이 아닌데. 나는 그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내일은 저 투명한 유리창 밖에 누군가의 짐을 들고 서 잇을 사람이 나일수도 있다. 오늘의 주변인이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사노라면 얼마든지.
사람들이 거의 다 새어나가고 밀도가 낮아진 전동차 안. 왼편 끝자리, 홀로 텅빈 좌석에 앉아 울고 있는 여자를 봤다. 청바지를 헐렁하게 입은 그녀는, 노란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한갈래로 묶은 그녀는 고개를 허벅지까지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앞서 지나갔던 할머니의 등처럼 처녀의 등은 휘어있었다.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인생의 하중이 느껴졌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Ella Fitzgerald의 스윙풍 재즈인 Clap Yo' Hands 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과 대비되는 너무 밝고 경쾌한 곡이었다. 나는 옆 사람의 슬픔을 나누고 싶어졌다. 고 김광석 씨의 라이브앨범에 실린 '그날들'로 노래를 바꿔 틀고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에도 그녀의 눈물 방울은 자신의 허벅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휴지라도 건네주고 싶었다. 손수건 비슷한 것도 없어서 안타까웠다. 긴 전동차 안에서 다리를 꼬은 두 중년남성과 그들의 무관심한 시선과 고개숙인 그녀와 고 김광석 씨의 '그날들'이 어우러져 철바퀴의 지속적인 소음에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전차의 종착역에서 나는 그녀의 무거운 공기와 함께 내렸다. 그녀는 위로, 나는 아래로 갈리어 다른 전동차로 환승했다. 그녀는 알까? 누군가가 자신의 슬픔을 나누려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앞으로 그녀가 그토록 힘든 슬픔과 조우할 때마다 누군가가 그녀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물이 땅에 스며들어 어느 마른 뿌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듯, 우리 모두는 물이 되고 뿌리되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도 누구에겐가 이렇게 부지불식 간에 아름다운 마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사랑이란게 그런거지.
슬픔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어려운 문제이다. 오는 길에 울면서 다투고 있는 어린 커플을 또 봤다. 그들의 눈물은 앞서 본 눈물과 어디가 닮았고 어디가 다른걸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나의 눈물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사실. 모든 이의 눈물은 마치 나의 눈물과 닮아있다. 내가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그들의 눈물 속에는 그렇게 사실 나의 눈물이 투영되어있다. 내 눈물이라고 착각하는 그 눈물도 사실 나의 눈물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렇게, 슬픔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씨앗일까. 마른 나의 눈가를 만져보았다. 울 수 있는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